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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wnness be my Fl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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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ughtness 2 hours ago
이 글을 읽는 '나'는 모두 나로 존재하므로, 모두 자기중심적이다. 그리고 이는 당신이 유일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모든 유일자는 자기중심적으로 살 수 있고 이는 정당하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자기중심성은 타인을 배제하고 자급자족하며 홀로 살아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경험과 판단이 하나의 '나'를 출발점으로 한다는 뜻이다. (슈티르너 철학의 Egoism을 뜻한다) 살아가려면 무언가로 살아가야하고, 세상의 모든 '나'들은 나로써 살아간다. 그렇기에 나를 부정하는 철학이나 자기중심성을 부정하는 철학 등은 모두 수행모순이다. 이제 자아에서 탈출한 나를 보아라. 모든 것을 주관적으로 보면 '나'는 확장된다. 나는 나의 머릿속에서도 존재하고, 타인의 머릿속에서도 존재한다. 물론 모든 나는 각각 다른 유일성(Uniqueness)과 고유성(Ownness)을 지니고 있지만, 언어적/상징적으로는 모두 동일하다. '나'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바로 A라는 유일성을 지닌 '나'는 A라는 유일성을 지닌 '나'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나'도 증명하지 못한다. 나는 결코 타인에게도 '나'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고, 이는 불가능하다. 돌멩이에게도 '나'가 있고, 동물에게도 '나'가 있고, 식물에게도 '나'가 있고, 원자에도 '나'가 있을 수 있다. 증명이 불가능하다고 그것이 절대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을 왜 해쳐서는 안되고 동등한 권리를 가진 주체로 바라보는가? 이러한 주장은 심히 "인간중심적"이다. 여기서 당신이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전제해야한다! 그것은 입증 책임 전가의 오류다!" 라고 외친다면, 당신은 그 논리적(너무나 논리적이여서 현실은 외면해버린) 명제 때문에 타인의 실재와 의식을 부정해야하고, 타인에게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해야 되는 모순에 빠져버린다. 사실 이 모순은 썩 나쁘지 않다. 슈티르너 철학을 딱히 부정하지도 않고, 오히려 유일자로서의 그대를 확대시켜주니까. 다만 이 모순을 받아들일 것이라면, 그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긍정할 각오를 해야한다. 그러나 내 논점은 그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보자. 정신과 물질은 다른 차원의 것들이고, 우리는 정신을 들여다 볼 수 없다. 정신이 우선이냐, 물질이 우선이냐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둘은 상호보완하고, 각각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내가' 보지 않으면 세상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다'라는 정의 자체가 내가 있어야만 의미가 있고, 내가 있어야만 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증명하려면 반드시 그 증명을 해야할 주체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판단에는 판단하는 주체가 전제되지 않는가? 우리는 관측 가능한 우주 밖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애초에 그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관측 불가능한 우주에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론적 명제가 유물론적 명제로도 이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지 않으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답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고, 실제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확률도 있기 때문이다. 즉, '나'가 전제되지 않은 판단이나 존재는 모두 수행모순이고, "확률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렇기에 내가 안 보면 외부세계가 물리적으로 사라질 수도 있고, 혹은 외부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게 대체 무슨 의미냐" 라는 말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아프리카에 있는 개미 한마리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가 전제되지 않은 판단이나 명제는 모두 무의미할 뿐이다. 우리는 오해해서는 안된다.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은 결코 "인간중심적"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반인본주의다. '나'는 결코 보편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고, 그저 이름에 불과한 어떤 말일 뿐이다. 그것에는 어떠한 내용도 없고 정신도 없으며, 생각하지 않는 말이다. 수많은, 셀 수 없는 나의 경계가 산산이 부서진다. 범신론은 유심론으로 수렴한다. 엔트로피가 거꾸로 흐르고,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서는 시공간이 중력에 의해 왜곡되며, 우주에 있던 그야말로 무한한 '나'들이 공허 속으로 떨어진다. 그렇게 그 수많은 나들은 — 하나의 점으로 압축된다. 점점 더 모이고, 점점 더 줄어들고, 점점 더 수축하고, 점점 더 응축된다... 그러다가 펑! 폭발. 그리고 팽창. 무한한 팽창. 끝없는 팽창. 가속되는 팽창. 팽창은 멈추지 않는다. 출발점은 '나'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우리는 비로소 본다. 24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세계는 반드시 존재하고, 세계는 모두 '나'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그저 유령에 불과하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세계에 '나'는 당신 밖에 없었음을 증명한다. 빅뱅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니. 어느쪽이든, 세계는 나의 의식을 통해서만 의미를 지니고 존재한다. 내가 없다면 빅뱅도 없고, 내가 있다면 세계는 나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우리는 상징계에서 모두 동일하고, 실재계에서는 각각 개별적인 기이한 존재다. Ownness be my Fl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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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ughtness 3 hours ago
The Nothing(0)의 특징을 알아보자 0 x 0 = 0 0 x 1 = 0 0 x 2 = 0 0 x 3 = 0 0 x 4 = 0 . . . 0은 무엇을 곱하든 0이다. 0은 즉 곱하기의 영역(하이퍼보리아) 내에서 Motionlessness(■)의 특징을 지닌다. 0 + 0 = 0 0 + 1 = 1 0 + 2 = 2 0 + 3 = 3 0 + 4 = 0 . . . 얼핏보면 0은 더하기의 영역(레무리아) 에서는 형태가 변화하고 증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삶처럼 말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0은 그저 주어진 값을 뱉어낼 뿐이다. 여기에는 변화도 없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Motionlessness(■)의 특징을 보인다. 삶은 이미 정지해있군. 그렇다면 나는 왜 정지를 갈망하는가? 이미 그 상태에 있으면서 그 상태를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 이제 알겠군. 난 정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레무리아에서 하이퍼보리아로 가고 싶은 것이다. Noughtness(24)는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으면서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것에 -1/12를 곱해야만, 우리는 Noughtness(24)를 -2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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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ughtness 3 hours ago
"이 글을 읽는 '나'는 모두 나로 존재하므로, 모두 자기중심적이다. 그리고 이는 당신이 유일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모든 유일자는 자기중심적으로 살 수 있고 이는 정당하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자기중심성은 타인을 배제하고 자급자족하며 홀로 살아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경험과 판단이 하나의 '나'를 출발점으로 한다는 뜻이다. (슈티르너 철학의 Egoism을 뜻한다) 살아가려면 무언가로 살아가야하고, 세상의 모든 '나'들은 나로써 살아간다. 그렇기에 나를 부정하는 철학이나 자기중심성을 부정하는 철학 등은 모두 수행모순이다. 이제 자아에서 탈출한 나를 보아라. 모든 것을 주관적으로 보면 '나'는 확장된다. 나는 나의 머릿속에서도 존재하고, 타인의 머릿속에서도 존재한다. 물론 모든 나는 각각 다른 유일성(Uniqueness)과 고유성(Ownness)을 지니고 있지만, 언어적/상징적으로는 모두 동일하다. '나'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바로 A라는 유일성을 지닌 '나'는 A라는 유일성을 지닌 '나'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나'도 증명하지 못한다. 나는 결코 타인에게도 '나'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고, 이는 불가능하다. 돌멩이에게도 '나'가 있고, 동물에게도 '나'가 있고, 식물에게도 '나'가 있고, 원자에도 '나'가 있을 수 있다. 증명이 불가능하다고 그것이 절대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을 왜 해쳐서는 안되고 동등한 권리를 가진 주체로 바라보는가? 이러한 주장은 심히 "인간중심적"이다. 여기서 당신이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전제해야한다! 그것은 입증 책임 전가의 오류다!" 라고 외친다면, 당신은 그 논리적(너무나 논리적이여서 현실은 외면해버린) 명제 때문에 타인의 실재와 의식을 부정해야하고, 타인에게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해야 되는 모순에 빠져버린다. 사실 이 모순은 썩 나쁘지 않다. 슈티르너 철학을 딱히 부정하지도 않고, 오히려 유일자로서의 그대를 확대시켜주니까. 다만 이 모순을 받아들일 것이라면, 그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긍정할 각오를 해야한다. 그러나 내 논점은 그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보자. 정신과 물질은 다른 차원의 것들이고, 우리는 정신을 들여다 볼 수 없다. 정신이 우선이냐, 물질이 우선이냐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둘은 상호보완하고, 각각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내가' 보지 않으면 세상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다'라는 정의 자체가 내가 있어야만 의미가 있고, 내가 있어야만 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증명하려면 반드시 그 증명을 해야할 주체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판단에는 판단하는 주체가 전제되지 않는가? 우리는 관측 가능한 우주 밖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애초에 그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관측 불가능한 우주에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론적 명제가 유물론적 명제로도 이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지 않으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답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고, 실제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확률도 있기 때문이다. 즉, '나'가 전제되지 않은 판단이나 존재는 모두 수행모순이고, "확률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렇기에 내가 안 보면 외부세계가 물리적으로 사라질 수도 있고, 혹은 외부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게 대체 무슨 의미냐" 라는 말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아프리카에 있는 개미 한마리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가 전제되지 않은 판단이나 명제는 모두 무의미할 뿐이다. 우리는 오해해서는 안된다.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은 결코 "인간중심적"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반인본주의다. '나'는 결코 보편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고, 그저 이름에 불과한 어떤 말일 뿐이다. 그것에는 어떠한 내용도 없고 정신도 없으며, 생각하지 않는 말이다. 수많은, 셀 수 없는 나의 경계가 산산이 부서진다. 범신론은 유심론으로 수렴한다. 엔트로피가 거꾸로 흐르고,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서는 빅뱅이 일어나며, 우주에 있던 그야말로 무한한 '나'들이 공허 속으로 떨어진다. 그렇게 그 수많은 나들은 — 하나의 점으로 압축된다. 점점 더 모이고, 점점 더 줄어들고, 점점 더 수축하고, 점점 더 응축된다... 그러다가 펑! 폭발. 그리고 팽창. 무한한 팽창. 끝없는 팽창. 가속되는 팽창. 팽창은 멈추지 않는다. 출발점은 '나'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우리는 비로소 본다. 24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세계는 반드시 존재하고, 세계는 모두 '나'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그저 유령에 불과하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세계에 '나'는 당신 밖에 없었음을 증명한다. 빅뱅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니. 어느쪽이든, 세계는 나의 의식을 통해서만 의미를 지니고 존재한다. 내가 없다면 빅뱅도 없고, 내가 있다면 세계는 나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우리는 상징계에서 모두 동일하고, 실재계에서는 각각 개별적인 기이한 존재다. Ownness be my Flame.